1월 중순, 저는 새로운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팀원들과 스펙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진행할수록 의욕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넘어야 할 산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답답했고 무기력감이 몰려왔습니다.
마치 시지프스가 된 기분
작년까지만 해도 어렵고 도전적인 업무를 도맡아 했던 저였기에 이런 감정이 낯설고 당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번아웃 이 온 건가 싶더라구요. 그리고 작년 동료 평가에서 ”번아웃이 걱정 된다” 는 피드백을 들었던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2월 중순이 되었고 당시의 감정은 어느 정도 추스렀습니다만, 이런 감정이 생긴 이유를 분석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시의 경험을 돌아보고 번아웃을 맞이한 이유와 해결책을 고민하는 과정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번 포스트를 통해 번아웃을 맞이하는 저만의 이유 분석과 해결책을 고민하는 과정 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약
세 가지의 키워드로 그 이유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1월의 우울: 환경적 요인
- 깊은 몰입과 잦은 상황 변화: 개인 성향적 요인
- 보물섬 찾기와 배 만들기: 조직적 요인
1월의 우울
기쁨이기도 하지만 걱정이기도 한 새해
첫 번째는 환경적 요인, 1월의 우울증입니다. 작년 1월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올해도 같은 감정이 찾아와 이를 하나의 원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검색해 보니 이는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더군요.
이와 관련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1월에 유독 상실감과 무기력감을 느끼는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 일조량 감소: 1월은 일조량이 가장 적은 달로, 햇빛을 받을 시간이 적어지면서 우울감이 증가할 수 있음
- 연말연시의 스트레스: 한 해를 결산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과정에서 부담감을 느낌
- 휴가 종료: 연말 휴가 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무기력감을 경험
저 역시 여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연말에는 긴 휴가를 다녀왔고, 연말까지 끝내야 할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막판 스퍼트(?)를 내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1월이 되면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크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완성된 2024년, 이제 2025년의 도화지에 첫 스케치를 할 시간
새해라는 환경적 변화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을 주는데요. 그것이 저에게는 마치 그리던 그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숨을 돌렸더니, 흰 도화지를 새로 받아 스케치부터 시작하려는 느낌 같았습니다. 막상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 금방 익숙해지겠지만, 처음엔 막막하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죠.
다행히 1월의 우울감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설 연휴를 맞이하면서 충분히 휴식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지금은 한결 나아졌고, 다시 평상시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깊은 몰입과 잦은 상황 변화
둘 사이의 밸런스를 찾는 과정
두 번째 이유는 개인 성향적 요인인업무에 대한 깊은 몰입과 잦은 상황 변화의 충돌이었습니다.
저는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해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결과의 디테일과 완성도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런 업무들을 맡으면 끝까지 완벽하게 완성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곤 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열정과 동기 부여를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죠. 그래서인지 실제로 작년에 회사에서 제가 맡은 업무들도 대부분 그런 성향을 반영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업무 스타일은 인내심과 끈기를 요구하는데요, 저는 이 분야에서 매우 재능(?)이 뛰어난 편입니다.
위 사진은 제가 고등학생 때 진행했던 행동 발달 항목 테스트 결과지인데요. 인내심이 평균적인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편으로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당히 아웃라이어(?)라고 볼 수 있죠. 이러한 성향은 개발자로서 어려운 문제를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장점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확실한 환경과 잦은 변경 사항은 저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빠르게 프로토타이핑을 하거나 개념 증명(Proof of Concept) 중심의 업무는 흥미를 끌지 못했죠. 그런데 제가 속한 팀은 해외향 신규 서비스 런칭 을 목표로 하는 팀이기 때문에 서비스 방향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기획 변경(피보팅, Pivoting)이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공들여 만든 작업물들이 사용되지 않고 폐기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심리적인 저항감이 커졌습니다.
이 방향이 아닌가? 다른 길로 가보자!
물론 저는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회사의 서비스 방향이 계속 바뀌고, 동의할 수 없는 결정이 내려질 때면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과물에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제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했죠. ‘코드가 버려질 수도 있다는 걸 의식하고 덜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맞는 걸까?’ 라는 고민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코드의 주인은 아닐지라도, 그 탐색 과정은 가치 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팀원들에게 저의 고민을 솔직하게 공유하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돈을 받고 일하는 이상, 코드의 주인은 결국 회사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물에 과몰입하는 것이 꼭 좋은 방향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몰입과 상황 변화를 대처하는 방법으로는 결과를 탐색하는 과정 또한 가치 있다 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코드의 가치는 단순히 배포된 결과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이 팀에 축적되고, 팀원들에게 공유되면서 무형 자산이 됩니다.
팀원들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업무를 스스로 평가해 보았을 때 우리는 일반적인 웹 서비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흥미롭고 도전적인 업무를 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저의 경험은 팀에 자산으로 남아서 다른 팀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제가 개발한 기능이 폐기된 적이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 이후 프로젝트에서 더 나은 코드를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 경험을 팀원들에게 전수하면서 팀 전체의 역량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통해 결과물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의 시간과 노력이 허사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결국 어디선가 다시 쓰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이야말로 가장 값진 자산이니까요.
보물섬 찾기와 배 만들기
보물섬을 향한 항해
세 번째 이유는 조직적 요인, 일의 목표와 방향,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일의 목표와 방향에 공감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동기 부여에 큰 영향을 미치는 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서비스의 목표와 방향이 여러 번의 피보팅을 거치며 정확하게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팀원들에게 이 내용을 공유할 때 저는 보물섬과 배 를 비유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일반적인 목표 지향적인 회사에서는 이렇게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바다 너머에 보물섬이 있다고 해보죠. 육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보물섬을 찾기 위해 배를 만들고 노를 젓습니다. 이 과정이 물론 힘들고 어렵겠지만, 목표가 명확하고 향하는 방향이 명확하다면 그 노력이 가치 있게 느껴질 거예요.
그런데 저희 조직은 좀 반대인 것 같아요. “일단 배를 만들어. 그리고 노를 저어봐. 그러다 보면 보물섬을 만날지도 몰라.” 라는 느낌이 들어요.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동기 부여가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보물섬을 찾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이자 목표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 정하는 것이 선장의 역할일 거예요. 그리고 실무자는 선장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합니다. 이것이 각자의 역할이니까요.
열심히 노를 젓기 위해서는 보물섬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명확하지 않다면 노를 젓는 것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이를 통해 저는 조직 관점에서 탑다운 의사 결정을 내릴 때 충분한 설명과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실무자가 리더에게 편하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창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조직의 이런 부분이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매우 큰 조직에 속해 있는 실무자의 입장으로써 여기에 대해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결국 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가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구요.
하지만 팀원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감정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론
모든 직장인들 화이팅!
초반에는 번아웃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원인을 분석하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저는 멘탈적으로 한층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노력과 가치를 인정해 주는 팀원들에게 감사함을 느꼈고, 솔직한 대화를 통해 신뢰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충분한 휴식과 팀원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도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죠.
이렇게 해서 번아웃의 이유를 분석해 보았는데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는 상황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개발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퇴사나 이직 같은 극단적(?) 선택지도 있겠지만, 저처럼 본인을 둘러싼 상황과 성향, 감정을 분석해 보고 글로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